30대가 되서야 돌아보는 저의 20대는요. 사실 여행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아요. 매 해 이 곳에 가봐야지, 저 곳에 가봐야지, 계획하는 것마저 즐거웠으니까요.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시간과 돈, 그리고 무엇보다 젊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봐요. 돌이켜보면 그 때가 제가 생각하는 여행의 황금기였던 것 같아요. 여행을 꼭 누군가랑 같이 가야지 라는 생각은 없었고요. 자유롭게 물 흐르듯 그냥 훌쩍 떠나는 거에요. 그렇게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립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지극히 혼자 있고 싶어서, 아무하고도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믿겨지실까요? 좀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잠시 제 현실을 내려놓고 잠깐 다른 세상에 다녀오는 것 있잖아요. 말도 안 통하고 환경도 다르고 공기 조차 다른 낯선 곳에 가서 온전히 저한테만 집중할 수 있게끔요. 그 때 당시 직업상 매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매번 다른 동료들을 만났기에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엄청 커다란 배터리를 달고 다니다가 네 개의 바 중 하나만 남아서 깜빡 깜빡 거릴 때 즈음... 여행가서 가득 충전해오면 다시 반짝 반짝 빛나는 생활이 이어지는 거죠. 정처없이 떠도는 방랑자가 아니라, 다시 돌아갈 곳이 있는 그런 여행 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이탈리아로 일주일 정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5일은 로마에서 머물고 하루는 피렌체, 당일치기 폼페이 여행까지 나름 알차게 보내고 왔습니다. 저의 여행은 무조건 걷기 입니다. 그래서 로마가 너무 좋았던 게 두 다리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럴 때 있잖아요. 분명 목적지를 정하고 출발했는데, 도착해보니 잘못 온 거에요? 근데 알고보니 몰랐던 유적지 였던거죠. 이게 얼마나 반가운 만남인지 아직도 그 기분이 남아있습니다. 로마 전체가 지금까지도 살아 숨쉬는 유적지이기에 가능했던 것 같고요. 원래 철저히 계획하는 스타일인데도... 나중엔 한 두 군데만 정해놓으면 어쨌든 지나가다가도 덤으로 보게 되니,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잘못된 길도 천천히 둘러보는 걸 선택했죠. 일단 모든 여행의 숙소는 에어비앤비를 통해 구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방문자 리뷰를 최대한 꼼꼼히 읽어봅니다. 영어로 한국어로 전부 모조리 읽어보고, 왠만하면 별점이 낮은 리뷰부터 읽어봅니다. 그럼 이 숙소의 장 단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 중심부에 있는 한 오래된 빌딩의 숙소를 찾았습니다. 10대의 아이들이 있는 한 어머니가 하는 곳이었고 아침 식사가 제공되며 오로지 여자들만 받는 숙소였습니다.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보인 아주 오래된 유럽식 옛날 엘리베이터에 순간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긴 탔는데도 생각보다 좁은 공간과 무엇보다 위험해보여서 타자마자 그냥 계단을 이용할 걸 그랬나 생각했죠. 모든지 처음은 겁이 납니다. 해 보면 별 거 아니었는데도 말이죠. 막상 도착한 숙소에서 한 이탈리안 어머니가 환하게 맞이해 주시는데 모든 근심이 싹 사라졌습니다.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고 일단 방을 둘러본 후 옷부터 갈아입었습니다. 여행 왔지만, 여행자 처럼 입지 않고 마치 여기 사는 사람처럼 차려입고 간단하게 핸드백 하나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지 더 돌아다니기 편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트레비 분수, 판테온, 콜로세움, 진실의 입, 나보나 광장, 스페인 광장, 비토리오 에마누엘 2세 기념관, 보르게세 미술관 등등 매일 매일 주구장창 걸어다녔습니다. 돌아다니다가 찾은 길목 중국집에서 국수 한 그릇 든든하게 먹고 젤라또 아이스크림도 먹고 그냥 하염없이 걷고 보고 구경했습니다. 찍은 사진도 별로 없이 계속 걷다가 날이 어둑해지면 근처 슈퍼가서 와인과 치즈 조각 좀 사서 숙소로 들어옵니다. 말끔히 씻고 혼술하다가 책 읽다가 잠듭니다.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지극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건 참 특별한 경험입니다. 단지 환경만 좀 바뀌었을 뿐 저의 하루는 평소와 같달까요? 지나가다 바에 가서 커피 한 잔도 마셔보고요. 커피에 진심인 이탈리아에서 스타벅스를 찾아보겠다고 또 계속 걸어봤고요. 감히 이탈리아에서 스타벅스 커피를 찾다니요ㅎㅎ 그렇게 라바짜, 일리 커피를 실컷 마시고 나서 이탈리아를 떠날 때 즈음엔 기념품으로 모카 포트도 샀습니다.
어느 날 로마의 아침, 숙소에서 아침 먹으러 주방으로 가보니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느 프랑스 여자 분이 간단하게 아침을 드시고 계시더라고요. 정말 늘씬하고 온화한 미소를 품고 계신 분이었는데, 발에 깁스를 차고 계시더라고요. 뭔가 사연이 있겠거니.. 하고 궁금증을 뒤로 한 채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제 자리에 앉았는데 흔쾌히 앞 자리에 앉으라며 손짓하더라고요. 평소 같았으면 조용히 혼자 아침 먹고 바로 나갔을 텐데, 혼자 다니는 게 심심해질 무렵이었을 수도, 사연 있는 분의 이야기가 궁금했을 수도, 그 날 아침은 누군가 얘기하고 싶은 그런 날이었을 수도 있겠네요. 어쩌면 그 분도 답답했나봐요. 처음 보는 사람한테 잠깐 속 얘기를 꺼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 분은 로마에 온 지 한 달 정도 되어 가는데... 온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을 보기 위해서래요. 사랑하는 사람이 이탈리아 사람이고, 그 사람과 더 깊은 대화를 하기 위해 이탈리아어도 배우러 다니다가, 얼마 전 지하철에서 넘어져서 다리에 깁스차고 다닌다고요. 그런데... 왜 에어비앤비 숙소에 계시지?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 어디에? ... 꼬리에 꼬리를 물고 궁금증이 더욱 증폭될 무렵 말을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 그의 가족과 남부로 여행을 떠났어. 내가 여기에 왔는데도 말이야.. 그래도 괜찮아.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어."
그의 가족이라... 잠시 머뭇했습니다. 어떤 가족을 말하는 걸까. 고작 잠깐 이야기 한 걸로 이 사람에 대해 가타부타 판단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최대한 주관적인 생각을 배제한 채 이야기를 이어나가려고 노력했죠.
"그 사람을 정말 많이 사랑하는구나?"
"응, 맞아. 그 사람은 내게 행복이 뭔지 알려준 사람이야. 나는 행복한 적이 없었어 사실, 그래서 전 남편과 이혼도 했고,, 내 삶은 정말 불행했어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나는 그 사람을 많이 사랑해 (세상 온화한 표정으로)"
"그럼 그 사람 곧 만나기로 한거야?"
"... 잘 모르겠어. 기다려봐야지."
짦지만 긴 여운이 남는 대화였어요. 이렇게 사랑에 미칠 수도 있구나. 사람마다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분명 서로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겠습니다만... 그저 각자 선택한 삶이 있겠거니, 이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겠거니 그저 훌훌 털어내 봅니다. 분명 그 사람도 제가 앞으로 더 이상 마주칠 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속 얘기를 불쑥 꺼냈던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오랜 기간이 지난 지금도 그 대화가 선명하게 기억나는 걸 보니 적지 않은 충격이었나봅니다. 그 때는 프랑스인을 잘 몰랐으니... 그저 사랑과 낭만이 충만한 사람들이구나 생각하고 넘겼죠. <먼 나라 이웃 나라> 프랑스편에도 나오잖아요? 프랑스인 한 명이 있으면 자기 중심적이고, 두 명이면 사랑을 하고, 세 명이면 혁명이라고요. 지금은 프랑스에도 살아보고, 프랑스어도 좀 할 줄 알고, 프랑스인 남편도 있고...ㅋㅋㅋ 일부 겪어보니,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랑에 기꺼이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인 것도 같아요. 사랑에 나이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달까요. 프랑스에서 살던 어느 날, 남편이랑 커피 마시다가 우연히 다른 테이블에 있는 어떤 할머니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 할머니는 싱글이었고요. 어떻게 싱글인지는 잘 모릅니다. 모르는 사람과 대화할 땐 너무 깊게 질문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들 저마다의 사연이 있겠죠. 어쨌든 제가 이해한 게 맞다면... 그 분은 사랑을 찾고 있는 한 여성이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더 이상 할머니로 보이지 않았다고 하면 너무 이상할까요? 그녀도 그저 눈빛이 반짝이는... 사랑을 찾아나선 여성이었습니다. 외국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는 "아, 그럴 수 있지" 라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로 매 번 다짐합니다. 제 시야를 넓혀가는 과정이기도 하고요. 저도 모르게 갖고 있는 색 안경 따위 벗어 던집니다.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차고 넘치니까요. 제가 옳고 그름을 따질 이유는 전혀 없었죠. 다시 로마의 한 프랑스 여인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로마를 떠날 때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결국 하지 않았습니다. 망설였거든요.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라서요. 행운을 빌어도, 응원한다 해도, 너무 주제 넘은 것 같았거든요. 그저 그 여인이 앞으로는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다음 화에 계속 됩니다..
한번 사진 정리를 싹 하면서 유에스비에 저장을 해뒀는데... 그게 어디로 갔을까요. ㅜ ㅜ 슬픕니다. 찾으려고 보니 없네요... 이탈리아 사진이 이렇게 없다니요. 또 생각 안하고 있으면 문득 나타날런지요. 제발 잃어버린 것은 아니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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