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깐 눈 감아봐, 눈 앞에 아주 커다란 하얀색 벽이 있다고 상상해봐. 가장 먼저 무슨 생각이 들어?"
"...음 낙서하고 싶은 걸?"
옛날 옛적 썸남과 첫 데이트 하던 날이었어요. 그 때 당시 이 질문의 의도가 뭐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일종의 심리테스트 였던 것 같은데 그 결과조차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ㅋㅋㅋ 그렇습니다. 아주 옛날 옛적이니까요. 그런데 이 질문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이유는 이 질문 자체를 상상하는 게 참 좋았습니다. 내 키보다도 집보다도 훨씬 큰 새 하얀 벽이 내 눈앞에 있다면 저는 정말이지.. 지금 우리 애들이 하는 것처럼 (T_Tㅋㅋ) 마구마구 낙서하고 싶거든요. 예쁜 낙서 말이에요.. 그림도 그리고... 하고 싶은 말도 적어보고.. 필사도 해보고.. 구석구석 꼼꼼히 낙서하고 제일 중요한 건.. 지우지 않고.. 유유히 사라지는 거죠. 이건 현실에선 말도 안되겠지만요..ㅋㅋㅋㅋㅋ
중학교 때였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생각합니다. 일부러 화나게 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지금도 무지 죄송합니다. 주번이었던 저는 하얀색 분필가루가 묻어있는 칠판을 보고 아이디어가 솓구쳤습니다. 그 짧은 쉬는 시간에 양손바닥으로 다닥다닥 찍어 꽃게 칠판을 만들어놨습니다. 선생님이 들어오자마자 (그때 당시 사랑의 회초리가 있었습니다.) 회초리로 교탁을 탁탁 치더니 이거 한 사람 나와서 아마 교실 밖으로 쫓겨났던 것 같아요...ㅋㅋ 고등학교 때는 어느 특정 과목이 지루했었는지 수업을 듣는 동안 교과서 보는 척하면서 책상 위를 검정색 컴퓨터 사인펜으로 글씨와 그림으로 가득한 낙서로 꽉 채웠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저만의 예술이었습니다. 결국 선생님한테 걸려 지우개로 깨끗하게 다 지웠습니다만.. 미련은 없었습니다. 저만의 예술적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학교 다닐 때 필기하는 것도 참 좋아했습니다. 그 중 사회 과목을 참 좋아했는데.. 그 이유가 선생님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는 말이 "교과서 접어" 그리고 칠판에 선생님이 정리한 핵심내용을 필기하며 수업을 들어야했습니다. 무엇보다 교과서에 쓰여진 내용이 아니라 직접 글씨를 써서 자기만의 노트를 만들어야 했기에 50분동안 참 바빴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에도 쏙쏙, 쓰는 재미도 솔솔, 막간을 이용한 재밌는 이야기들까지.. 몰입도가 최상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겐 참 번거로울 수 있는 수업이었겠지만 저한텐 참 기억에 남는 수업입니다. 칠판에 글씨 쓰는 것도 좋아해서 학급회의 시간에 칠판 서기도 도맡아 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글씨 쓰는 게 좋은 저는 글을 쓰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매일매일 일기도 씁니다. 일기를 쓸 때도 마치 안네의 일기처럼 나의 일기가 먼 훗날 과거를 들추어볼 수 있는 자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성스레 쓰기도 합니다. 천재적인 작가 마냥 시/소설 을 쓰는 그런 글은 아니어도 제 삶의 기록 그 자체이기에 하나하나 애정이 갑니다.
글을 쓸 때 만큼은... 자유로워집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내 깊은 속 이야기를 써보기도 하고, 하루 일과를 쓰기도 하며, 저만의 공간에서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훨훨 날아오릅니다. 아무리 두서없이 써 내려간 글일지 언정, 아무리 글씨를 휘갈겨써도, 문법이 안맞아도, 횡설수설 엉망이어도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저만의 글이니까요. 그렇게 다 쓰고 나면 왠지 모르게 생각 정리도 되고 내 마음이 이랬구나 위로도 됩니다. 회복이 된달까요? 그게 제가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마치 레몬 같아요. 먹을때는 쓰디 쓴데 삼키고 나면 무지 달잖아요. 글도 그런 것 같아요. 쓸 때는 온갖 창작의 고통에 괴롭고, 때로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몰아쳐 막 쏟아내는데... 막상 쓰고나면 홀가분하고 뿌듯하거든요. 이 달달함에 취해 오늘도 내일도 꾸준히 써내려가나봅니다. 문득 블로그를 시작하길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